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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여요전쟁(한국사 3대첩 귀주대첩)

말랑헤롱 2024. 2. 13.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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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의 마지막인 3차 여요전쟁입니다.

강동6주

1차 여요 전쟁은 왜 고려는 거란과 국경이 접했는데, 바다 건너 송나라와 외교를 하느냐? 이러한 이유로 고려를 침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서희의 담판으로 오히려 강동6주를 점령하여 땅을 넓히게 됩니다.

 

2차 여요전쟁은 강조의 정변을 이유로 침략하게 됩니다. 

고려의 개경까지 점령을 하였으나, 나주까지 몽진한 현종, 거란으로 친조를 하겠다는 서신을 보내고 거란군은 퇴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3차 여요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1. 친조 혹은 강동 6주를 주시오

2차 여요전쟁때 고려의 현종이 거란으로 가서 친조를 하겠다는 거짓 항복으로 거란군을 퇴각시켰습니다.

하지만 당시 현종은 몽진을 하면서 끝까지 항전을 하고자 한 임금이고, 결국 퇴각하는 거란군을 양규와 김숙흥이 고려인 포로를 구출하는 반면 거란군을 죽이고, 결국 애전전투에서 양규와 김숙흥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전사하면서 2차 여요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고려조정은 전쟁의 폐해에서 벗어나는 한편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하면서 곧 친조를 하겠다. 곧 친조를 하겠다. 이제 친조를 하러 가겠다, 시간을 벌게 됩니다.

이에 화가 난 요나라의 성종은 현종의 장인 김은부를 인질로 잡아놓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려의 사신은 계속해서 "왕이 병에 걸려 친히 조회하러 올 수가 없다"라고 사신을 보냈지만, 화가난 요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빼앗겠다고 선언을 하게 됩니다.

 

 

2, 계속되는 거란과 여진의 공격

동계가 동북면입니다.

강감찬을 동북면행영병마사로 파견해서 여진족을 막게 합니다. 거란은 대규모 병사 대신에 국지전으로 침략을 하게 됩니다.

1013년부터 1018년까지 계속되는 국지전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고려의 성 어느한곳도 점령을 못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1014년에 김훈, 최질의 난이 발생하게 됩니다. 문신들이 국난으로 녹봉이 밀리자, 무신들의 영업전을 빼앗아, 그걸 녹봉으로 주고자 한 일로 난이 발생합니다.

처음에는 성공적으로 난이 성공하는 듯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자림이 계책을 세우게 됩니다.

서경에서 무신들을 위해 연회를 벌이고 있을 때 무신들이 취했을 때 김훈, 최질 등 무신 19명을 처형시키면서 김훈, 최질의 난이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거란은 국지전을 벌이는 한편, 사신을 보내어 강동 6주를 반환을 요구를 하게 됩니다.

1018년 거란이 대대적으로 침략을 할 준비가 되자, 고려 역시 강감찬을 서경유수로 임명하였고, 그해에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원수로 하여 동원령을 내리게 됩니다.

1018년 12월에 요나라 성종은 소배압을 도통으로 삼아 10만의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하라고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3.3차 여요 전쟁

1018년 12월에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너게 됩니다.

이에 고려군은 강민첨 대장군을 기병 12000명을 파견하여 흥화진 동쪽에 삼교천 계속에 매복을 하게 됩니다. 기록에서는 수공으로 이겼다고 합니다. 

10만 군대로 패배를 하지만 남하를 하게 됩니다. 이에 고려 현종은 개경의 경계를 강화를 하게 됩니다.

 

결국 거란군은 신은현(황해도 신계군)까지 진격하게 됩니다. 개경에서 100리에 불과한 지역까지 오게 됩니다.

계산을 해보니깐 차로 1시간 거리까지 거란군이 진격을 하였습니다.

 

 

고려 현종은 백성들을 거두어 들여놓고 거란군이 청야전술을 할 수 없게 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손녕은 개성의 통덕문으로 가서 군사를 돌릴 것이라고 알리고 몰래 척후기병 300여 기를 금교역에 보냈고, 하지만 고려의 병사가 100명을 보내어 급습하게 됩니다.

 

1019년 2월 1일에 귀주대첩이 일어나게 됩니다.

 

3. 귀주대첩
고려사절요의 따르면 고려군 208300명 거란군 100000명입니다.

1차, 2차에 비해서 거란군의 숫자는 적지만 거란군은 이때 최정예 부대를 출전시켰습니다.

거란군에 개경으로 남하를 하면서 잃은 병력을 대비하면 대략 9만~8만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이어합니다.

2월 기축 초하루. 거란(契丹)의 병사들이 구주(龜州)를 지나가자 강감찬(姜邯贊) 등이 동쪽 교외에서 마주하여 싸웠으나 양쪽 진영이 서로 대치하며 승패가 나지 않았다. 〈이때〉 김종현(金宗鉉)이 병사들을 이끌고 도달하였는데, 홀연히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깃발들이 북쪽을 향해 휘날렸다. 아군이 그 기세를 타고 분발하여 공격하니, 용맹한 기운이 배가 되었다. 거란군이 북쪽으로 달아나자 아군이 그 뒤를 쫓아가서 공격하였는데,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기까지 쓰러진 시체가 들을 가득 채우고, 노획한 포로·말·낙타·갑옷·투구·병장기는 이루 다 셀 수가 없었으며, 살아서 돌아간 적군은 겨우 수천 인에 불과하였다. 거란의 병사들이 패배한 것이 이때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거란의 군주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소손녕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네가 적을 가볍게 보고 깊이 들어감으로써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볼 것인가? 짐이 마땅히 너의 낯가죽을 벗겨낸 이후에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록에도 보면 고려군의 숫자가 10만 명이나 훨씬 많았지만, 거란군은 정예부대로 귀주벌판에서 싸웠지만 결판이 안 났습니다.

결국 김종현의 철기기마부대가 거란군의 후방을 습격하였고, 이때 거란군이 혼란을 틈타 강민첨의 기병 14000명이 정주 방향에서 귀주에 도착해서 거란군의 중심부를 돌격하여 거란군을 포위하고 싸우게 됩니다.

이에 거란군은 그냥 무조건 북쪽 거란땅 지역으로 도망가기 바빴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귀주에서 거란군을 무찌르고 강감찬, 강민첨은 개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 현종이 금으로 만든 꽃 8가지를 친히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주게 됩니다.

강감찬에세 금꽃을 쫒아주는 현종

위에 있는 그림이 귀주에서 승리 후 현종이 강감찬에게 금으로 된 꽃을 꽂아주는 장면입니다.

 

이로서 여요전쟁이 끝이 나게 됩니다.

현종이 거란에게 사신을 보내, 이전처럼 번국을 칭하고 공물을 바치게 해 줄 것을 청하였고, 역류했던 야율행평을 돌려보내주고, 다시 조공과 책봉관계를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거란은 수락하고, 더 이상 고려왕의 친조, 강동 6주 반환은 안 하게 됩니다.

 

KBS에서 역사스페셜로 귀주대첩을 방영한 것도 있지만,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이제 3차 여요 전쟁을 어떻게 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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