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알아보자

흥화진은 지킨 양규는 어떤 인물인가?

말랑헤롱 2024. 1. 8. 13:38
728x90
반응형
SMALL

 

고려거란전쟁의 양규
천추태후의 양규

여요전쟁에서 엄청난 공을 세운 장군입니다.

1차 여요전쟁에서는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6주를 획득하게 됩니다.

2차 여요전쟁에서는 강동6주 중에 최전방인 흥화진방어를 성공하고, 거란군에게 빼앗긴 곽주성을 탈환 등, 수만명의 고려인포로를 구하고, 거란군이 겁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도륙한 장군입니다.

 

고려의 맹장 중에 한명입니다.

2차 여요전쟁때 3명의 맹장을 뽑자면 지채문, 양규, 김숙흥정도가 있습니다.

 

고려사에서는 양규의 기록은 여럿 등장합니다.

 


고려사 양규열전

"양규가 거란 침략군의 항복 권유를 거부하고 흥화진을 굳게 지키다"

목종을 섬겼고, 차례로 승진하여 형부낭중이 되었다. 이후에 현종 1010년 거란이 강조를 토벌 이유로 흥화진을 포위하였다

양규는 도순검사가 되어 흥화진에서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고, 이에 거란 양규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양규는 거절하였다.

 

고려사에서도 흥화진전투부터 등장하게 됩니다.


 

고려사 양규열전

"양규가 통주의 아군을 수습하고 곽주를 급습하다"

흥화진이 함락이 안되니, 거란군은 남하를 하였다. 통주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였지만, 중랑장 최질, 흥숙 등이 거란의 사신을 체포하고 결사항전을 하겠다고 선포를 하였고, 거란군의 계속되는 공격에 통주성은 방어를 성공하였다. 이후에 통주성을 버리고 다시 남하를 하였으나 곽주성을 다스리는 호부원외랑 조유성이 밤중에 도주를 하였고, 신녕한, 승리인, 간영언이 곽주성을 항전을 하였으나 성은 함락당하고 싸운 이들은 전사를 하였다.

거란군은 6000여명을 잔류시켜 성을 지키게 하였다. 이에 흥화진의 양규가 흥화진에 700여 명, 삼수채에서 와해된 1000여명을 수습하여, 밤중에 곽주로 들어가 거란 병사를 모조리 죽였고, 7000여명의 고려인 포로를 통주로 옮겼다.

 

여기서도 양규의 활약을 볼수가 있습니다.

흥화진에서는 3000여명의 군사로 40만의 대군을 방어를 성고하였고

이번에는 1700여명의 군사로 거란군 6000여명이 지키는 성을 함락시키게 됩니다. 

 


 

고려사 양규열전

" 양규가 퇴각하던 거란 침략군을 무로대 등지에서 공격하여 승리하다"

거란이 개경까지 침입하여 궁궐을 불태우고, 퇴각을 하였다

귀주별장 김숙흥,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군을 기습하여 10000여 급을 베었다.

양규는 거란군을 무로대에서 습격하여 2000여 급을 베었고, 고려인 포로 3000여 명을 되찾았다.

이후에 이수에서 석령까지 거란군 2500여 급을 베었고, 포로 1000여 명을 되찾았다.

3일 후에는 여리참에서 싸워 거란군 1000여 급을 베었고, 포로 1000여 명을 되찾았다.

이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고, 애전에서 맞아 싸워 1000여 급을 또 베었다

 

성을 버리고 도주한 장수들도 많았지만, 양규는 최전방 흥화진을 지켜냈고, 이후에 함락된 곽주성을 탈환하고,

퇴각하는 거란군을 수없이 많이 베었습니다.

 


고려사 양규열전

"양규와 김숙흥이 전사하다"

얼마 뒤에 거란(契丹) 임금의 대군이 갑자기 진군해오자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이 종일 힘써 싸웠지만, 병사들이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모두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거란군은 여러 장수들의 초격(鈔擊)을 받았고, 또 큰 비로 인하여 말과 낙타가 쇠잔해졌으며, 갑옷과 무기를 잃어버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퇴각하였다. 정성(鄭成)이 그들을 추격하여 적군이 강을 반쯤 건널 때 후미에서 공격하니, 거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이 심히 많았다. 항복했던 여러 성을 모두 수복하였다. 양규는 고립된 군사들[孤軍]과 한 달 동안 모두 일곱 번 싸워 죽인 적군이 매우 많았고, 포로가 되었던 30,000여 구(口)을 되찾았으며, 노획한 낙타·말·병장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양규와 김숙흥은 끝까지 거란군의 목을 베다가 결국 전사하게 됩니다.

 


고려사 양규열전
"현종이 양규와 김숙흥 및 그 가족들에게 전공을 포상하다"

현종은 양규에게 공부상서를 추증하였고, 양규의 처에게 곡식을 지급하였고, 그의 아들, 양대춘에게는 교서랑을 임명하였습니다.

양규의 가족에게는 해마다 벼 100석을 하사하게 됩니다.

김숙흥에게는 장군 벼승을 추증하였고, 김숙흥의 모친에게 곡식을 지급하였습니다.

이에 김숙흥의 가족에게는 해 마다 곡식 50석을 지급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1019년에 양규와 김숙흥에게 공신녹권을 하사하였고, 1024년에는 다시 삼한후벽상공신을 칭호를 하사하였습니다.

 

이후에 11대 임금 문종때의 일입니다.

"문종이 양규와 김숙흥의 초상을 공신각에 걸어두게 하다"

1010년에 거란이 침략했을 때, 양규와 김숙흥이 몸을 바쳐 힘껏 싸워 여러번 적을 격파하였으나,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아서 전쟁 중에 전사를 하였다. 그 전공을 추념하여 마땅히 표창해랴 할 것이니, 공식각에 초상을 걸어서 후대 사람들에게 권장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그의 공적을 삼고 있습니다.

 


고려사 양규열전

"양대춘"

양대춘은 양규의 아들입니다.

정종 6년에 안북대도호부부사가 되었다. 상서좌복야 최충이 아뢰길, "양대춘은 세운 뜻이 높고 빼어나며 지략이 많아서 군사일에 익숙합니다. 만약 국경에 변란이 있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보낼 만한 사람이 없으며, 마땅히 외직에 보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규의 후손은 양대춘도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후에 문종 초에 양대춘이 병이 들자 조회를 면제해 주고, 단지 겸관의 사무만 보게 하였다.

 

이게 고려사에 기록이 있는 양규와 김숙흥의 기록들입니다.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