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알아보자

강감찬은 어떤 인물이였는가?

말랑헤롱 2024. 2. 7.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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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참의 표준영정

강감찬 역시 고려를 지킨 영웅 중에 한 명입니다.

보통은 고려거란전쟁을 3차례로 역사서에 있습니다.

1차는 서희, 2차는 양규와 김숙흥, 3차는 강감찬입니다.

 

그럼 강간찬은 어떤 인물이었나?

 

1. 강감찬은 호족 출신으로 문관

강감찬이 3차 여요 전쟁에서 고려군을 지휘를 하여, 모르는 분들은 장군, 무관인 줄 아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강감찬은 문관 출신입니다.

고려 성종 때 과거에서 심지어 장원(1등)을 하여 예부시랑, 한림학사를 거치게 됩니다.

지금 고려거란전쟁에서 2차여요 전쟁에서 강감찬은 예부시랑으로 부르고 있죠. 그다음에 2차 여요전쟁이 끝나고는 한림학사가 되었습니다.

강감찬의 출신은 고려 건국공신 중에 삼한벽상공신의 강궁진의 아들입니다.

 

아쉽게도 드라마 태조왕건에서는 안 나옵니다. 강궁진이라는 인물의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궁진의 아들이 바로 강감찬입니다.

 

2. 현종 즉위 이후에 출세길

성종 때 과거를 급제했지만,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현종이 즉위를 하면서 무려 강감찬의 나이 60세 때 드디어 출세길이 열리게 됩니다.

강조의 정변을 기회 삼아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게 됩니다.

1차여요 전쟁 때도 항복론, 할지론으로 의견이 나눠었고, 이에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을 만나 담판을 짓고, 오히려 영토를  넓히게 됩니다.

2차 여요 전쟁 때도 항복을 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강감찬 혼자 몽진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현종은 몽진을 선택하게 됩니다.

2차 여요 전쟁이 끝나면서, 현종에게 공을 인정받아 한림학사승지와 좌산기상시를 겸하였고, 이후에는 동북면행영병마사로 파견되어서 여진의 침입을 방어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의 고려거란전쟁에서 강감찬이 동북면병마사로 파견된 걸 방영을 하고 있습니다.

고려거란정쟁의 강감찬(최수종)

이후에도 현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여러 관직을 하게 됩니다.

현종 9년 5월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를 겸하게 됩니다.

지금의 평양을 고려시대에는 서경이라 불렀고, 유수직은 즉 서경의 총관리자입니다.

이는 동북면병마사, 서경유수를 했다는 건 차후에 거란이 재침을 할 경우 대비하게 위한 인물을 강감찬으로 봤다는 겁니다.

그리고 10월에는 서북면도통사에 위임되어 사실상 군사의 전권을 받게 됩니다. 

 

3.3차 여요전쟁

2차 여요 전쟁에서 철수한 거란은 계속해서 현종의 친조를 요청하였고, 이에 친조를 안 할 거면, 강동 6주를 다시 빼앗겠다는 조서를 고려에게 보내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동쪽에 동여진 해적들이 계속해서 울산, 경주 등을 계속해서 침략을 하게 됩니다. 이에 성을 쌓게 하면서,
강감찬을 이때 동북면병마사로 파견을 합니다. 

서쪽에서는 계속해서 친조 아니면 강동 6주를 빼앗겠다고 시위를 하고,

동쪽에서는 여진족들이 계속해서 고려를 침입을 했습니다.

 

이에 1014년에 중간에 고려에서는 김훈, 최질의 난이 발생을 하였죠.
김훈,최질의 난은 이러합니다. 계속해서 문관직이 최전방에 임관되어 불만이 있었고, 이에 중추원사 장연우, 황보유의가 무신들의 영업전을 빼앗고 이를 백관의 녹봉으로 충당을 하고자 한 이유로 현종 때 난이 발생합니다.

현종은 무신직이 있는 무관들을 문신을 겸하게 하였고, 조정을 개편하고, 무관이 문관을 겸하여 정사를 보게 되자, 고려 조정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거는 뒤에 이어지는 무신정변과 똑같은 일입니다.

이에 김훈,최진의 난에 대해서 이자림이 현종에게 계책를 올리게 되고,

이자림을 서경유수판관으로 임명하고, 이에 무신들을 위한 잔치를 하게 됩니다.

술에 취한 김훈, 취질 등 무관들을 주살하게 되면서 난은 진압하게 됩니다.

이에 장연우, 황보유의 다시 조정에 기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란은 계속해서 고려의 국경을 침입합니다. 하지만 별 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1018년 5월에 강감찬은 서경유수 겸 내사시랑 평장사로 임명이 되었고, 계속해서 거란의 침략이 다가오자

현종은 1018년 10월 강감찬을 상원수 겸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임명을 하고, 강민첨을 원수겸 부도통으로 삼아 전쟁을 대비하게 됩니다.

 

1018년 12월에 소배압을 도통으로 삼아, 거란군 10만이 고려로 재침을 하게 됩니다.

3차 여요 전쟁에서 흥화진 전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고려는 12000여 명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하였고, 굵은 밧줄과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에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다가오자 수공으로 이긴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거란군은 초반에 피해를 입었지만, 개경으로 진군을 하게 됩니다.

고려군은 청야 전술을 하면서 거란군을 말려 죽게 하였습니다.

거란군은 현재 신은현(황해도 신계군)에 이르었고, 개경까지 100리에 불과한 거리에 도착하게 됩니다.

1019년 1월에 거란의 소배압이 퇴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한국에 3대 대첩에 해당되는 귀주대첩이 있습니다.

https://malrrr.tistory.com/entry/3%EC%B0%A8-%EC%97%AC%EC%9A%94%EC%A0%84%EC%9F%81%ED%95%9C%EA%B5%AD%EC%82%AC-3%EB%8C%80%EC%B2%A9-%EA%B7%80%EC%A3%BC%EB%8C%80%EC%B2%A9

 

3차 여요전쟁(한국사 3대첩 귀주대첩)

고려 거란 전쟁의 마지막인 3차 여요전쟁입니다. 1차 여요 전쟁은 왜 고려는 거란과 국경이 접했는데, 바다 건너 송나라와 외교를 하느냐? 이러한 이유로 고려를 침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서희의

malrrr.tistory.com

3차 여요전쟁에 자료는 따로 글을 올렸습니다.

 

4. 강감찬 문화시중이 되다

천추태후-귀주대첩 승리 후 강감찬의 개선과 현종

 

현종 1019년(10년) 4월에 강감찬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궤장을 하사 받았습니다.

궤장이란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70세 이상 연로한 대신들에게 내린 하사품입니다.

조선시대 이경석의 궤장

궤장을 하사 받고, 관직을 하던 중에 1020년(현종 11년) 6월에 치사를 하게 됩니다. 즉 관직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에 강감찬의 기록은 없습니다. 당연히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어, 기록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1030년 현종 21년에 강감찬은 문하시중으로 승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현종이 죽은 3개월 뒤에 강감찬도 승하하게 됩니다.

 

역사서에도 강감찬의 평가는 아주 좋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고려사에는 성품이 청렴하고, 검약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고, 체구가 작고 외모는 못생겼으며, 의복은 더럽고, 헤어져서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기록이 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국가대가가 생길 때마다 정책을 결정을 지었으며, 기둥이자 초석의 열활을 하였고

풍년이 들고 백성이 편안하며 나라 안팎이 무사하자, 사람들은 모두 강감찬의 공이라고 생각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3차 여요 전쟁만 중점적으로 다로 글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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