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7일 고려거란전쟁 드라마에서 2차 여요 전쟁이 끝났습니다.
2차 여요전쟁의 영웅을 뽑으라면 당연 양규장군과 김숙흥장군입니다.
바로 왜 거란이 고려를 침략을 하였는지 알아봅시다.
1.강조의 정변
당시에는 7대 왕 목종이 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목종 즉위 시 목종의 나이가 어려, 어머니인 천투태후가 섭정을 하고 있었고, 천추태후 옆에 김치양이란 인물이 국정을 좌지우지했으며, 천추태후가 물러나고도 목종의 옆에는 유행간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목종은 동성연애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유행간입니다.
한마디로 목종이 즉위하고 김치양, 유행간들의 권신들이 있었습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사이에 아들이 태어나게 됩니다. 김치양은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고 시도를 하게 됩니다.
이에 목종의 이복동생 대량원군(현종)에게 후계자를 삼겠다고 발언을 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에게 개경의 궁궐을 수비하라고 명을 내리 됩니다.
근데 목종이 위독한 틈에 김치양이 나라를 뺏으려 한다는 소문이 계속해서 돌게 되고, 목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조는 개경으로 향하게 됩니다.
개경으로 향하던 도중에 아직 목종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목종이 살아있는 소식을 듣고 그냥 개경으로 진군을 하게 됩니다.
권신인 김치양, 유행간 등을 다 처형을 시키게 됩니다. 이에 강조는 목종까지 죽이게 됩니다.
2.거란의 침략명분
당시의 동아시아의 정세를 보면, 송나라와 요나라간에 1005년에 전연의 맹을 외교협정을 맺게 됩니다.
즉 평화협정입니다.
1. 송나라는 요나라에게 비단과 은을 매년 보낼 것
2. 국경선은 현재와 유지할 것
3. 송과 요의 황제는 형제관계를 맺는다. 즉 송나라가 요나라를 사대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1009년에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성종 때 1차 여요전쟁이 일어났으며, 서희의 담판으로 요나라에 사대관계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나라의 책봉을 받은 목종이 죽었고, 이를 기회삼아 2차 여요전쟁이 시작됩니다.
3. 흥화진을 지킨 양규와 3000여 명의 고려군사
거란은 1010년 겨울에 고려를 침입하게 됩니다.
1차 전쟁은 1차여요 전쟁 때 획득한 흥화진입니다.
당시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장군 장군 휘하에 약 3000명의 고려군, 그리고 약 40만 명의 거란군이 흥화진을 두고 전투를 하게 됩니다.
군사의 수를 봐서는 고려군의 패배가 예상되지만, 양규장군은 흥화진의 방어에 성공하게 됩니다.
4. 통주전투, 패배한 강조
요나라 성종은 흥화진전투에서 패배하자, 흥화진을 버리고 남하를 하게 됩니다.
강조는 공성전이 아닌, 삼수채평야에서 거란군이랑 싸우게 됩니다.
당시에 송나라, 고려에서 북방민족의 기병부대를 맞서 싸울 수 있는 검차로 대응을 하였습니다.
삼수채전투에서 고려군은 초기에는 승리를 하였습니다.
"강조가 검차를 일렬로 배치하여 두고 거란군이 쳐들어오면 곧 검차로 함께 공격하니,
모조리 물리치지 않음이 없었다. 《고려사》" 고려사에서도 검차로 승리를 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승리에 취한 강조는 당시에 바둑이나 장기를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란의 부대가 삼수채의 보류를 공격하였고, 보고를 들은 강조는 적의 숫자가 많이 않을 거라 보고, 휘하장수에게 섬멸하라고 지휘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강조는 거란군이 지휘부를 공격하여, 지휘부가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강조, 이현운, 노전, 노의 등 지휘부가 모두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결국 삼수채에서 패배한 강조, 하지만 거란의 통수성 공격은 역시 막게 됩니다.
이에 거란군은 통주성을 버리고, 남하를 하게 됩니다.
5. 서경 공방전
고려는 3경이 있습니다.
수도인 개경, 지금은 평양으로 불리고 있는 서경, 지금의 경주라 불리는 동경이 있습니다.
강조의 고려군 30만은 지휘부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저기 군사들이 와해가 됩니다.
이어 곽주성, 영주성, 숙주성이 차례로 함락을 당하게 됩니다.
이에 현종은 동북면의 군사를 서경을 지키라고 했으며, 중랑장 지채문이 도착하게 됩니다.
거란은 서경으로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를 하였습니다. 이에 서경의 부유수 원종석이 항복을 결정을 하였습니다.
서경이 항복하다는 소식을 듣고, 지채문은 닫혀있던 성문을 뚫고 급습하고 거란의 사절을 죽이고 항복문서를 붙태워 서경성의 항복을 막았습니다.
이에 고려는 동북면 군사를 이동시키기 위해서, 친조를 하겠다고 사신을 보냈고, 이에 현종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한기에게 기병 200명를 거느려 서경으로 향하게 합니다.
하지만, 한기가 서경에 도착하니, 거란의 사절이 소식이 없는 것을 추궁하였고, 이에 동북면에서 도착한 탁사정은 한기를 잡아서 죽이거나 포로로 사로잡았습니다.
이에 거란군이 패배를 하였다는 소식 들을 요 성종은 고려는 나를 속였다 하여, 다시 서경을 공격하였습니다.
지채문이 나가 싸우자 거란은 패배해 달아났지만, 이에 지채문은 거란군을 추격, 하지만 거란군의 포위에 패배하게 됩니다.
이에 동북면에서 지원은 탁사정과 대도수는 각각 서문과 동문으로 나가 싸우자고 하였지만, 동북면 도순검사 탁사정은 도망쳤고, 대도수는 싸우다가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이에 위태로운 서경성, 하급관리 조원, 애수진장 강민참, 낭장 흥협 등 혼란스러운 서경성을 수습하고 서경성 방어에 성공하게 됩니다.
6. 양규의 활약과 개경의 함락, 현종의 몽진
흥화진을 지킨 양규장 군이 함락당한 곽주성을 탈환하게 됩니다.
약 1700여 명의 군사를 가진 양규는 곽주성을 함락시킵니다.
거란군은 계속해서 남하를 하는 시점에서 거란의 배후를 계속해서 공격을 하게 됩니다.
서경에서 패배한 지채문이 개경에 도착하게 됩니다. 지채문의 보고를 듣고 개경은 또다시 혼란스러워집니다.
다른 신하들은 항복을 주장하지만, 강감찬은 남쪽으로 피난하여 끝까지 싸우자고 하였고, 이에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을 선택하게 됩니다.
계속되는 피난길,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을 하게 됩니다.
나주는 고려 태조의 오씨부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7. 개경 불바다... 현종의 피난길 김은부를 만나다.
현종은 결국 몽진을 하게 되고, 거란군은 개경의 진입하게 됩니다.
거란군은 개경의 태묘, 궁궐, 민가를 불태워 버립니다.
계속되는 몽진길에 공주 절도사 김은부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현종은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되고, 김은부의 첫째 딸에게 어의를 지어 올리게 하여, 김은부의 세 딸은 모두 현종의 왕후가 됩니다.
김은부는 드라마 천추태후, 고려거란전쟁에 나옵니다.
8. 거란의 철군하지만 양규와 김숙흠의 항전
현종이 또다시 거란의 황제에게 거란으로 친조를 하겠다고 사신을 보내게 됩니다.
이에 거란군은 철수를 시작하게 됩니다.
거란군은 개경까지 진군을 할 때는 오른쪽에 해안길로 왔습니다.
하지만 퇴근은 내륙길을 통해서 퇴각하게 됩니다. 이유는 흥화진의 양규장군이 곽주성을 탈환하고 삼수채전투에서 고려군 30만을 격파한 게 아닌, 지휘부를 포로로 잡았기에 아직 삼수채의 군사들이 또 양규장군으로 얼마나 모였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륙길로 퇴각을 하려면 귀주성의 협곡을 지나야 됩니다.
이때 고려군은 양규, 김숙흥이 귀주협곡에서 거란군을 습격하게 됩니다.
이때 고려인 포로를 많이 구하고, 거란군을 많이 죽이게 됩니다.
고려사절요
양규(楊規)가 다시 애전(艾田)에서 거란(契丹)의 선봉대를 급습하여 1,000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얼마 후 거란의 군주가 이끄는 대군이 갑자기 공격해 오자, 양규는 김숙흥(金叔興)과 더불어 종일토록 힘써 싸웠으나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졌기에 모두 진영이 무너져 전사하였다. 양규는 고립된 군대를 데리고 한 달 사이에 총 7번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사살한 거란의 병사들이 매우 많았고, 사로잡혔던 백성 30,000여 구를 되찾았으며, 획득한 낙타·말·병장기[器械]들은 이루 다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거란의 병사들은 여러 장수들의 공격을 받은 데에다 또다시 큰 비를 만남으로써 말과 낙타가 지치고 갑옷과 병기들은 모두 산실되었다.
퇴각하는 거란군의 맞서 싸운 양규와 김숙흥의 활약
양규와 김숙흥을 군사수로 밀어버리고, 결국 거란군은 압록강을 넘어서 본인의 영토로 돌아가게 됩니다.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오지만, 궁궐이 모두 불타, 수창궁에 들어가게 됩니다.
2차 여요 전쟁, 약 4개월간의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거란은 말 그대로 멸망직전까지 갔으나,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 귀주 별장 김숙흥의 활약으로 퇴각하는 거란군을 공격하게 되면서, 결국 방어에는 성공하지만, 수도와 서북면 일대가 모두 초토화가 되어버립니다.
고려땅에서 전쟁이 일어났으니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약하자면
거란이 우리가 책봉한 목종의 시해로 (강조의정변)으로 고려를 침략함
흥화진에서 패배 후 흥화진을 내버려두고 통주성으로 감
통조의 고려군 30만과 거란군 40만 대결함
고려의 검차부대에 잠시 막히나, 거란군의 기습으로 강조와 지휘부 포로, 고려군 30만은 와해됨
강조를 처형시킴, 이현운 등의 고려지휘부는 거란의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함
이어 곽주, 영주, 숙주성이 함락당함
발등의 불이 떨어진 현종은 동북면 군사를 서경으로 이동시키고, 요 성종에게 친조 하겠다는 거짓으로 사신을 보냄
요 성종이 친조를 받아들이고 진군을 멈춤
그 사이에 서경성은 항복을 하겠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동북면 중랑장 지채문이 서경성에 들어가 거란사절을 죽여버림
거짓항복이 드러나자 거란군 서경으로 침임
지채문이 성밖에 나가서 싸워서 이김
하지만 지채문 포위당함. 그에 탁사정, 대도수가 각각 동, 서문으로 나가서 싸우자고 하지만, 탁사정이 도망감, 대도수는 싸우다가 결국 항복함
그 사이 양규는 곽주성을 탈환함, 양규는 계속해서 후방에서 거란군을 흔들고 있음
지채문이 이 사실을 개경이 고함, 개경도 위험에 처하게 됨
항복론이 대두되지만, 강감찬은 몽진을 하라고 함, 결국 몽진이 결정됨
그 사이에 서경성 내버려두고 거란군은 개경으로 진군
개경함락
현종은 나주까지 피신, 중간에 공주 절도사 김은부를 만나 후한 대접을 받음
거란 황제가 거란으로 친조를 하겠다는 사신을 다시 보냄, 거란군은 전쟁이 지속되면 군사통제력을 일을까 봐 현종의 청을 받아들임
거란군 퇴각 시작
삼수채에서 와해된 군사들을 수습, 고려의 준곡령, 무로대, 이수, 석령, 여리참, 애전, 압록강 등에서 2차 여요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됨
협곡에서 계속되는 양규와 김숙흥의 승리, 고려군과 포로를 계속해서 구출함
하지만 애전전투에서 요 성종의 거란군 본대를 이끌고 나타나서 양규와 김숙흥은 전사함
하지만 7번 싸워서 포로 30000명 구출, 여러 병장기 획득 하면서 큰 성과를 올림
거란군은 양규와 김숙흥의 항전을 뚫고 결국 압록강 건너서 거란땅으로 들어감
요약을 해도 꽤 깁니다.
2차 여요 전쟁 요약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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