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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 뼈아픔 패배 "칠천량 해전"

말랑헤롱 2021. 10. 19.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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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밀어내고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패배, 칠천량 해전 입니다.

현 거제도 인근 칠천도

 

칠천량 해전 

 

칠천량 해전 1597년 8월 27일(음력 7월 15일)

 

임진년에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해서 다대포전투부터 장문포 해전까지 3년을 조명연합과 일본군이 계속 싸웁니다.

그리고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가 부산을 재침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삼도를 먼저 점령을 하라고 했습니다. 하삼도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뜻합니다.

이때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재침이 있을것이라고 정보를 줍니다. 그 정보는 조선 조정로 들어가게 되고, 이순신은 일본 선봉군이 도착하기 전에 격침을 하라는 명이 하달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전화기도 없던 시대라 명령을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상당히 걸립니다.

이미 일본 선봉군이 부산이 도착한 뒤에 명령을 받은 지라 이순신은 어떻게 할수가 없었습니다.

 

선조는 꼬투리를 잡고 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파직시킵니다. 선조는 당시에 의심이 많은 왕이였습니다. 

 

선조는 "나라면 일본군을 잡을수 있었다"라는 장계를 받고 이순식을 파직하고 후임으로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자리에 앉게됩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원균은 드디어 수군의 지위관이 됩니다. 하지만 원균역시 출전을 하면 패배할까, 핑계를 대며 출전을 하지 않습니다.

육군의 엄호 없이는 출전이 불가능 하다. 

 

 

 

 

1597년 8월 26일(음력 7월14일) 100여척 판옥선과 거북선 3척이 부산을 치기위해 출전합니다.

일본군은 부산으로 오기만을 기다렸고, 길을 다 열여둡니다.

 

부산포 앞바다에서 바람,파도도 고려하고 없고 추격하다가 12척 판옥선을 포류하게 만듭니다. 이순신이 있을때 이런 일이 한번도 발생이 안했는데, 원균이 출전하면서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결국 무리한 출정으로 조선 수군은 진을 다 빼놓게 됩니다. 그리고 이순신의 왜 부산을 공격 안했는지 깨달았고 한산도 통제영으로 귀환을 합니다.

일본군은 각 섬들에 매복을 하였고, 조선수군이 귀환할때 공격을 계속 하게 됩니다.

결국 칠천량에 진을 칩니다.

이때 당시 참전은 김완의 해소실록에는 이렇게 내용이 있습니다.

"원균은 칠천량에서 진을 치고 의욕을 잃은 채 술만 퍼 마실 뿐"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이순신이 왜 그토록 출전을 안했는지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1597년 8월 27일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칠천량까지 후퇴를 한 조선 수군, 조선 수군의 동태를 살피다가 칠천량에서 공격을 합니다. 결국 칠천량에서 거북선3척 침몰, 판옥선 140여척 침몰, 지휘관 포함 조선 수군 2만여명 궤멸하였습니다.

이때 경상우수사 배설은 판옥선 12척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합니다.

 

조선 수군이 역대 최악의 패배를 기록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때 이순신은 명을 어긴 이유로 백의종군을 명을 받고 도원수 권율이 머물고 있던 순천에 도착해서 병사들과 같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조정에서는 칠천량 해전에 패배를 듣고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합니다.

 

원균의 무능한 출전으로 인하여 조선수군은 0부터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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