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3대 대첩은 귀주대첩을 쓰겠습니다.
교전국
고려 vs 요나라(거란)
두 국가의 상황
고려 초기에 거란이 발해를 공격해서 발해가 멸망합니다. 이에 고려는 거란과 대립하였고 태조가 북진정책을 실시하였을 때도 우리 한반도 북방에는 거란국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즉 고려 초기부터 귀주대첩까지 고려와 거란은 대치상황을 하고 있었습니다. 틈만 나면 고려의 북쪽 지역을 공격하고 하곤 했습니다. 유명한 서희의 담판도 상대국이 거란입니다.
거란은 왜 고려를 공격했나?
1차 침입에서는 거란의 손소녕이 군대를 이끌고 옵니다. 거란 측의 입장은 고려는 신라에서 나온 국가인데 왜 북진정책을 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노리냐? 거란의 주요 주장입니다. 하지만 서희가 나아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고 주변국들 때문에 거란과의 교류가 안된다는 주장을 하였고 결국 강동 6주를 회복합니다.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말 한디로 강동6주를 회복합니다.
2차 침입에는 고려가 내부 사정이 말이 아니였습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이란 인물이 불륜을 저지르고...뭐 그 사이에 나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니 하니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세력을 제거 후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다시 즉위시킵니다. 이에 요나라를 강조의 죄목을 구실로 침입을 하게 됩니다.
2차 칩임으로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고 멸망직전 까지 갔으나 양규의 항전,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임명하고 30만대군을 주어 통주(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 막게 했으나 요나라는 강조를 붙잡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주까지 피난을 가서 하공진을 화친을 한다고 보내었고 결국 요나라는 화친을 받아 들이고 퇴각을 합니다.
하지만,
양규와 김숙흥은 요나라가 퇴각을 할때 지속적으로 공격을 하여 퇴각을 하다가 많은 피해를 입고 퇴각합니다.
3차 침입에는 고려 현종은 요나라와 친조하지 않음을 밝히고, 강동6주를 반환 요청에도 응하지 않고 다시 송나라와 무역을 개시했습니다. 이에 요나라는 다시 소배압으로 하여금 10만의 군대로 침입을 하게 됩니다.
귀주대첩 승리는?
요나라가 쳐들어 왔으니 고려도 당할 순 없으니 막으러 가라고 합니다.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약 20만 군대를 보냅니다.(근데... 이 시기에 20만 병력이면 국력 좋은 겁니다. 조선시대는... 전국 8도를 합쳐도 10만이 될까 말까 합니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일본한테 밀렸죠...)
전투 현황을 보면 압록강으로 거란군을 요격하러 갑니다. 압록강 유역 흥화진에서 거란군은 패배하지만 소베 압은 그냥 무조건 개경만 함락시키겠다는 생각으로 고려군을 우회해서 개경으로 진격합니다.
남하하는 도중에도 추격하는 고려군에 군사를 잃으면서도 계속 개경으로 향합니다.
그 결과 결국 개경 근처로 도착했지만 고려도 1차, 2차 침입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나라는 아녔겠죠. 당연히 개경을 더 굳게 지키기 위해 성을 축조하게 되는데 이를 뚫지 못하는 소베 압은 결국 퇴각을 합니다.
하지만 고려의 20만 요격 군은 끊임없이 거란군을 추격합니다.
퇴각 도중 구이저우 성을 통과해야 되는데 이를 알고 있던 고려에서는 당연히 길목을 차단합니다. 이곳 구이저우 성이 바로 귀주대첩을 일으킨 곳입니다.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고려와 거란은 끊임없이 싸우다가 결국 개경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귀주에서 거란군의 기세를 꺾고 승리를 하게 됩니다.
이후 상황
거란의 3차 침입이 끝나고 거란의 국력도 기울어집니다. 여진족의 금나라에 요나라는 멸망하게 됩니다. 고려는 무신정권기가 들어서고 이후에는 칭기즈칸이 건국한 원나라에 침공으로 원나라의 부마국(사위 국가)이 되고 이후에 공민왕이 국력을 회복하지만 결국 고려는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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